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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대학

  • 1906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간호교육기관
  • 다양한 교육과정 개설
  • 학부교육과정, RN-BSN 교육과정, 대학원 석,박사학위과정, 전문간호사 석사과정 등 세계화, 전문화, 정보화를 향한 교육과정 및 교육방법을 갖춤
  • 생행동 연구와 교육을 위한 설비를 확보한 실험실 운영
  • 연세시뮬레이션 센터
  • 이론적 지식을 실무에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첨단시설
  • 간호정책 연구소
  • 간호정책개발과 가정간호, 호스피스 사업에 대한 연구와 훈련을 목적으로 1973년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된 간호학 연구소
  • WHO 협력센터 : 국내 유일의 WHO 간호협력센터로 국제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전세계의 회원국들간의 기술과 자원을 공유
  • JBI 센터 : 군거 중심 간호 실무를 위한 국내 유일의 협력센터

간호사 배출 100주년 기념

돌봄의 손길이 절실한 한국 땅에서 하나님의 일꾼이 되라는 소명을 받은 미국인 간호 선교사 쉴즈. 그녀의 응답에 의해 연세간호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를 찾는 것이다."

시대의 소명에, 사랑과 헌신, 섬김으로 응답해왔던 연세간호의 선구자들! 이들이 이뤄낸 대한민국 간호의 역사, 그 100년의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근대화된 의료서비스에 목말라있던 한국인들! 1904년 근대식 세브란스병원은 환자들로 넘쳐났고, 간호인력은 부족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로 쉴즈의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는 그 서막을 올리게 되었다.

"1906년 가을, 세브란스간호부양성소가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2달여간의 실습기간을 거쳐 입학이 허용되었고, 3년에 걸친 교육 후, 졸업시험으로 간호사 면허를 대신하였다."

쉴즈의 지도아래 학생들은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시대의 소명에 응답하는 역량을 갖춘 간호사로 성장해 나갔다. 이들이 배우는 간호의 대상은 환자에 국한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사랑, 봉사, 헌신"-하영수 동문(1953년 졸업)

그리고 마침내 1910년 첫 졸업생인 김배세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일을 한 아버지와 언니인 한국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를 도운 경험과 환경은 기독교 정신에 기반된 간호를 배우고 실천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녀는 실제로 학창시절부터 실용간호학을 번역하여, 간호학교과서로 사용하도록 했고, 이후에도 간호촬요 등 다수의 간호 관련 문헌을 번역했다. 이는 한국어로 된 간호학 서적이 전무했던 시절,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김배세를 비롯한 졸업간호사들은 각 지역의 병원과, 지역사회에서 민족과 간호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환자의 신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과 영혼까지 돌보는 소명을 다하기 위해 전인적 간호의 방법들을 배워나갔다.
1917년 말에 간호선교사 로버츠를 중심으로 시작된 세브란스병원 영유아보건사업에도 참여해, 병원내에서 소외된 여성과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지역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일에도 사명감을 갖고 책임을 다하였다. 1920년대 여성교육과 사회사업을 담당했던 태화여자관내의 태화진찰소에서 보건간호사로 그리고 세브란스병원을 비롯한 선교기관들이 연합해서 조직한 “경성 연합 아동구제회“에서 활약하면서 아동보건을 위해 힘썼다. 또한 간호전문직 발전을 위한 조직적인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세브란스간호부양성소 졸업생들은 동문회를 조직해 활동했고, 일제의 암흑기 속에서도 조선인 간호사들로 구성된 조선간호부회를 만들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하지만 점점 짙어지는 전운과 일제의 폭압.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강제출국 조치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한국인 간호사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놓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간호원양성소가를 매일 부르며, 민족혼과 간호사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했고, 교표나 졸업앨범에도 태극문양을 사용해 민족의 자주성과 긍지를 지켜나갔다. 1907년에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군대가 강제해산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했고, 정종명을 비롯한 수많은 간호사들과 간호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해서, 민족을 위해 헌신했다. 당시 졸업반 학생들은 의료요원으로 전장에 투입됐고, 임시교사에서 배출된 졸업생들도 간호장교로 활약했다. 목숨을 건 헌신. 그것은 간호사로서의 소명이었다.

"목숨을 걸고 전장에서 나섰던 이유?"-김근화동문(1950년 졸) 6.25상황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거제도 장승포 초등학교에 마련된 전시간호학교에서는 동란으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부상자들을 간호했다.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가 재건되어가는 과정에서도 간호가 감당해야 될 시대적 소명을 다하였다. 1970년대 한국역사상 최초의 전문직 해외이주인 파독간호사들은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였고 젊은이들에게는 선진국 진출이라는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으며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우리의 선구자들은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 항상 함께 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이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연세의 간호사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간호사로서의 소명에 응답하여 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5천여명의 졸업생들은 또 다른 시대적 소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들이 부르는 병원 현장에서!
가정에서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찾아가는 아름다운 손길!
생의 마지막을 의미있게 준비하도록 돕는 아름다운 동행자가 되어주고 있고!
병원에서도 학교 교육의 지속적 학습과 정상적인 발달이 가능하도록 어린환자들을 돕고 있다.
정신적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도 !
지역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고!
의료혜택을 손쉽게 받을 수 없는 의료의 사각 지역과 학교 현장에서 보건교육과 건강관리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국민건강증진을 위하여 한국의 보건의료정책을 선도하며!
또한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 도처에서 간호선교사로 활약하며, 100년 전 쉴즈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돌봄의 손길이 절실한 이들에게 사랑과 헌신, 섬김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지난 100년, 시대가 요구하는 간호사로서의 소명을 다하며 사랑과 헌신,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해 온 연세간호선구자들!
앞으로도 연세 간호는 새로운 시대의 소명을 깨닫고, 이에 응답해 나갈 것이다.


간호대학 110주년 기념

한국 간호의 초석을 놓은 '쉴즈'

1906년 9월 쉴즈가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양성소를 창설하면서 연세간호교육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쉴즈는 1891년 미국 필라델피아 병원 간호원양성소를 우등으로 졸업합니다.

 

"세브란스병원 간호원 양성소를 만들 때, 모델은 내가 졸업한 모교였다."

필라델피아 병원 간호원 양성소에 책임자인 피셔는 나이팅게일에 6명의 제자 중 한명이 였습니다.

피셔를 통해 나이팅게일의 정신이 미국으로 직접 전해졌고, 다시 쉴즈를 통해 연세 간호로 전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 양성소는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이어 받으며 탄생하였습니다."

 

"저 에스터 루카스 쉴즈는 평생 직업으로 간호업에 입문 했으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곳에서 더욱 유용하리라 생각하며, 그런 자격으로 선교지 한 곳에 임명을 받기 위해 지원하는 바 입니다."

 

그러면 쉴즈는 언제부터 간호원 양성소 설립을 꿈 꿨을까요?

 

1897년 10월 한국에 도착한 쉴즈는 1년뒤인 1898년 10월 제중원에서 간호 업무를 시작합니다.

 

"에바 필드 여의사와 나는 병원으로 이사했다. 여학교 졸업생 2명이 간호업무를 도왔고, 우리는 간호원 양성소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1년 후, 1명은 결혼하고 나머지는 언니(의사)를 돕기위해 떠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쉴즈는 당시 간호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 본부에 다른 간호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과로때문에 선천으로 적을 옴기고 전도 활동에만 전념하다 안식년을 마치고 1906년 귀국한 후,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 양성소를 설립하게 됩니다.

세브란스 병원 간호원 양성소는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 교육을 했으며, 보구여관 간호원 양성소 학생들도 와서 함께 배웠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 관습으로 인해 남자 환자 간호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통을 뒤엎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일본 통간부에 의한 구 한국군대에 강제 해산이었습니다.

개교 당시 간호 교수진이 턱없이 부족 했으나 세브란스 의학교 출신 의사들과 우수한 외국인 간호사들이 교파와 관계없이 연합하여 교수로 참여 하였습니다.

쉴즈는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들에 도움을 받아 여러 간호 교과서를 번역하였습니다.

1908년 6월 다섯명의 간호학 학생에게 처음으로 가관식을 거행했고, 1910년에는 1회 졸업생 "김배세"를 배출 하게 됩니다.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직후 쉴즈는 헬렌 포사이드에게 모든일을 넘겨주고 한국 간호계의 원로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쉴즈는 간호사들에 상호협력과 권익을 위한 조직화에 앞장섰고, 그 결과, 1923년 대한간호협회에 뿌리인 조선간호부회가 창설된 이후 국제 간호협의회에 대표로 파견 하였습니다.

또 한 학문적 발전을 위해 1925년 조선 간호부 회부를 창단 함으로써 한국 간호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연세 간호는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한국 전쟁에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쉴즈에 나이팅게일 정신을 이어 받아 전문적 책임을 다했습니다.

 

"쉴즈를 통해 나이팅게일의 정신을 계승한 국내 최고의 간호교육 기관인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은 이제 110년을 넘어 세계적인 간호의 리더로써 건강한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 더 멀리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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